수원 화성의 여러 시설들
(1)성벽
(2)성문
(3)수문
(4)장대
(5)공심돈
(6)각루
(7)포루
(8)포루
(9)봉돈
수원 화성의 가치
맺음말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항상 그의 생부를 그리워하고 1777년 임금자리에 오르던 해에 곧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라 추존(追尊)하였다. 이런 영조는 즉위후 13년(B.C. 1789년) 10월에 이르러 장헌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이봉(移奉)하여 처음에는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장종(莊宗)으로 추존한 후에 융릉(隆陵)으로 개칭하였다.
정조는 수원을 소경으로 함과 동시에 유수를 배치한 다음, 생부 장조가 묻힌 화산릉 가까이 가서 있겠다는 생각으로 장차 수원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18년-20년에 걸쳐 수원성을 축조하였으나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으로 누었다가 24년에 49세로 붕어하였다.
이렇듯 수원성은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단지 효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왕권을 세우려는 왕권강화의 의지가 있었다.
신도시 화성은 서울과 삼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화성의 지세는 주산이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평탄한 개방된 곳으로 바로 물자의 소통이 원활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한 새로운 도시에 적합한 것이다. 정조는 이 도시가 상업이 활발한 곳이 되기를 염원하여, 상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특별 조처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왕은 도성을 지키는 최고 정예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둘로 나누어 그 하나인 장용외영을 화성에 두는 획기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이 점은 정조가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여기에 새로운 성곽을 쌓은 진정한 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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