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은 ꡐ삼일천하ꡑ로 끝나고 말았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가 청(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인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 해피레포트는 다운로드 받은 파일에 문제가 있을 경우(손상된 파일/설명과 다른자료/중복자료 등) 1주일이내 환불요청 시 환불(재충전) 해드립니다.
(단, 단순 변심 및 실수로 인한 환불은 되지 않습니다.)
·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브라우저 오류로 인해 다운이 되지 않으면 고객센터로 문의바랍니다.
· 다운로드 받은 파일은 참고자료로 이용하셔야 하며,자료의 활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운로드 받은 회원님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안내
보고서 내용중의 의견 및 입장은 당사와 무관하며, 그 내용의 진위여부도 당사는 보증하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저작권 및 모든 법적 책임은 등록인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저작권 문제 발생시 원저작권자의 입장에서 해결해드리고 있습니다. 저작권침해신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