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사진의 유입
① 주로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이 1분 내외의 이야기도 주제도 없는 짜투리 필름 혹은 아마추어 필름을 다른 물품의 판매촉진용(흥행용)으로 써먹음.
② 1897년 설부터 1905년 설까지. 1903년 경 상영은 이미 상설관화된 다음으로 보임.
③ 실사풍물이나 춤, 코메디, 마술 등 인위적 연출이 가미된 쇼 프로와 같은 오락적인 내용으로 개화기 계몽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생한 (도피적) 경험으로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선전도구로서 유입됨. 민중들보다는 생활여유가 있던 계층에게 향수되었을 것.
④ 1910년, 영화 흥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길이, 내용 등이 이전보다 풍부해졌으며 수많은 극장이 출현하고 변사도 등장.
*무성영화 전기(19-26)
① 1919년 조선영화 자본이 만든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투>(김도산 각본, 감독)가 연쇄극(연극 중간중간에 극적 효과를 높이거나 실연이 어려운 부분을 필름으로 찍어서 막에 비춘 것)의 형태로 제작됨.
② 19-26년(22년까지가 연쇄극 시절)까지 극영화 25편, 기록영화 7편이 조선에서 제작되었으며 23년 이후 26년까지 무성영화 전기에는 단성사를 비롯한 9개의 제작사가 있었다. 극장은 서울에 12개 등 전국에 총 27개, 조선배우학교도 있었다.
③ 22년부터 일제는 영화 필름에 대한 검열을 시작.
④ 무성영화 전기 (19-26) 영화들의 주제는 이룰 수 없는 사랑, 권선징악, 옛날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들 중심. 촬영은 거의 일본인이, 조선 영화인들은 배우에서 조감독 등을 거쳐 감독을 맡았으며 영화문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기술적, 연출적 실수가 많았다. 일본 자본이 40%, 일본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따라서 일본 영화계의 풍토의 영향이 컸다(흥행 개념으로 영화를 대하는 성향, 주제의 신파성, 비현실성, 애정탐닉적 성향, 즉흥적 군집으로 미래를 도모하는 일회적 한탕주의 성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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