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도 전화·신문·TV와 같은 정보채널(미디어)의 하나로 대접받는 시대가 왔다. 로봇이 힘든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자동기계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미디어로봇이란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시장에서 로봇기술의 최대 장점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뿐 아니라 당사자의 인격까지 대변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봇은 인류가 만든 최고급의 정보미디어로서 그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디어로봇은 통신산업과 로봇산업의 합작품이다. 로봇이 미디어 매체로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 시기는 인터넷 혁명이 시작된 지난 90년대 이후다. 초기에는 인터넷망을 통해서 원격지의 로봇을 제어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로봇을 통해 양방향 의사소통을 하는 연구로 발전했다. 지난 몇년 새 이동통신과 무선랜의 급격한 보급은 미디어 로봇의 실용화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 양방향 비디오 통신이 보편화되면서 로봇기술과 접목하는 시도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에서는 로봇이 라디오·TV·PC·휴대폰을 잇는 제5의 미디어 매체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혹자는 미디어로봇이 영상휴대폰, 와이브로, 양방향TV 등에 비해 무슨 장점이 있냐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로봇은 여타 첨단 미디어 매체를 압도하는 고유한 장점을 갖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닥터로봇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 존스 홉킨스 병원은 RP-7을 실제 진료행위에 투입하는 실험을 했다. 많은 의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환자는 사람의 얼굴이 비치는 로봇을 통해 의사와 병증을 상담하고 처방을 받는 데 별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 환자는 오히려 로봇닥터의 회진을 반기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원격지의 의사가 휴대폰의 영상통화로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렸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환자들은 의사가 무성의한 진료행위를 한다며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을 것이다. 미디어로서 로봇은 여타 통신매체와 달리 사용자의 인격을 대체하는 상징적 권위를 갖는다. 이는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진 기계인 로봇만이 갖는 특성이다. 누군가 로봇을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워 원격지의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면 여타 통신매체(e메일·전화·영상채팅)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고 심도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사람이란 모니터 속의 글자나 전화기 음성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로봇의 존재감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1위의 통신장비업체 시스코는 RP-7의 로봇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원격 로봇회의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 시스코의 체임버스 회장이 지난해부터 호언장담해온 혁명적인 영상회의장치란 결국 기동성을 갖춘 영상 미디어, 로봇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미디어로봇은 인간의 의사소통능력을 다른 차원으로 향상시키는 첨단매체로 각광받을 것이다. 회의장, 파티장소에서 낯익은 얼굴의 로봇끼리 몰려다니며 수다를 떠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미디어로봇의 현재와 미래> 사례 1: 현재 요즘 미국 미시건주의 22개 종합병원에서는 새로 배치된 로봇닥터 ‘RP-7’의 활약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로봇 전원을 켜면 RP-7의 상단부 모니터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의사의 얼굴을 비춘다. 의사는 원격로봇을 통해서 다른 주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처방을 내린다. 또 의사가 조이스틱을 움직이면 로봇은 병원 내 어디라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원격제어로 조정되는 ‘바퀴달린 영상전화기’인 셈이다. 얼핏 보면 국내 무의촌 도서지역에 설치한 영상진료 시스템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RP-7의 진가는 환자들의 반응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로봇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실제 의사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안정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조악한 영상진료와 차별화된다. 로봇닥터는 이동하면서 직접 환자와 눈을 맞추고 격려한다. 또 병실환경을 꼼꼼히 체크하고 간호사에게 직접 처방을 내린다. 심지어 로봇에 내장된 청진기를 통해서 환자의 신체상태를 점검하기도 한다. 미시간 종합병원의 환자와 스태프에게 병원복도를 홀로 돌아다니는 로봇은 이미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라 권위를 갖춘 의사의 분신이다. 의료업계는 로봇닥터를 통해서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도착했으나 담당 전문의가 없을 때 원격진단으로 사망률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의사들도 응급환자를 위해 상시대기하는 부담을 경감할 수 있어 로봇닥터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다. RP-7을 개발한 인터치 헬스사의 율룬 왕 CEO는 “환자들은 큰 병원으로 옮겨도 친숙한 동네의사와 상담하길 더 원한다”면서 “의사와 환자를 연결하는 로봇기술의 확산은 의료서비스질을 높이고 과도한 의료비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사례 2: 미래 일본의 한 초등학교. 어느 날 로봇이 책가방을 메고 교실문을 들어선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이와모토 사토루군입니다.” 원격조종 로봇을 통한 대리등교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된 후,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탄 채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해온 사토루는 새로운 법안실험의 첫 대상이 됐다. 사토루는 자신의 분신처럼 움직이는 원격제어 로봇을 통해서 학교생활을 새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로봇에게 ‘히노키오’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학교 전체의 관심은 히노키오에게 쏠린다. 지난해 국내서 개봉된 일본 영화 히노키오는 로봇기술이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될 때 궁극적 모델을 보여줘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 소년이 외부와 소통하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대리인 로봇을 통하는 것뿐이다. 소년은 로봇을 통해 단순히 수업내용을 전달받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교실에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공유한다. 본래 아픈 학생을 대신해 학교에 다니는 출석 로봇으로 개발된 히노키오는 주인공의 사회생활을 대신하는 분신으로 거뜬히 활동한다. 학교 친구들도 히노키오를 기계로봇이 아니라 친구의 인격체로 간주하며 지낸다. 로봇을 매개체로 한 어린이들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국내 흥행에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디어와 로봇기술의 통합이 가져올 파장을 잘 묘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실제로 일본·미국에서는 교육현장에서 출석을 대신하거나 전쟁터에서 위험한 취재를 대신하는 미디어로봇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인격 대변하는 매개체로 미디어학자 조너선 스튜어(1995)는 인류가 만든 온갖 미디어 매체를 ‘생생함’과 ‘양방향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류한 바 있다. TV·영화는 생생함에서 책보다 훨씬 앞선다. 전화는 양방향성에서 신문, 이메일을 압도한다. 우측 상단으로 갈수록 생생함과 양방향성이 높아져 ‘가상현실감(Telepresence)’을 느끼는 데 유리하다. 사람들이 굳이 초대형 HDTV로 주문형 콘텐츠를 보는 데 큰 돈을 쓰는 이유는 현실에 더욱 가까운 미디어 매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 도표에 로봇을 추가로 넣는다면 맨 오른쪽의 최상단에 놓일 것이다. 미디어 로봇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주변 사람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데다 오프라인 환경에 직접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인간의 자연스런 의사소통능력을 모방하는데는 지금까지 나온 어떤 미디어 매체도 로봇을 따라가지 못한다. 로봇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완벽에 가까운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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