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규모 1000억여원에 50건의 프로젝트, 참여 기관만 100여곳.` 유럽연합(EU)이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과 정보통신기술(ICT)의 만남’을 목표로 지난 2000년 초부터 진행중인 공동 프로젝트의 개괄적 현황이다. 이는 진행됐거나 현재 진행중인 것들만 집계한 수치이며 관련 예산과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선진 문화기술(CT) 사례를 찾아 지난해말 8박 9일의 일정으로 영국·독일·프랑스 등 유럽 3개국 6개 기관을 탐방하고 돌아온 CT 공동조사단에게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이처럼 기술을 활용해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살찌우는데 유럽 전체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프로젝트는 국가와 국가, 대학과 대학, 산업계와 산업계, 나아가 이들 간의 연합에 의해 다양하게 진행된다. 전체 프로젝트를 조율하는 코디네이터 국가를 중심으로 많게는 수십개국이 공동연구자로 참여하기도 한다.
‘영국의 소기업 지원기관인 크리에이티브미디어센터(CMC)’의 디렉터 짐 크리스티씨는 “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로 재탄생한 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각국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문화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며 “EU가 그 해답을 디지털 기술에서 찾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EU 국가들은 고고학이나 문화재 정보를 디지털 문서화하는 비교적 단순한 프로젝트부터 디지털 문화유산 기술개발 로드맵을 마련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까지 각자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유럽 문화유산의 발전’을 위해 똘똘 뭉쳤다. 상업적 이익도 중요하지만 인적 교류·교육·관광 등을 통해 전체 유럽을 하나로 묶는 거시적 관점에서 CT를 활용하고 있다. 이중 ‘에포크(Excellence in Processing Open Cultural Heritage)’는 80개 파트너가 참여하는 대표적인 유럽 공동 프로젝트다.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미국과 남아프리카, 호주, 심지어는 극동지역 국가까지 관여한다. CT를 활용해 사람들이 문화유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목표로 지난 2004년 시작돼 오는 2008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에포크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영국 브라이톤 대학의 카리나 로드리게스 박사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보여준 각종 결과물은 ‘기술적으로는 놀랍지 않지만 활용성 측면에서는 놀랄만한’ 즉 ‘꼭 필요한 맞춤형 기술을 개발한다’는 CT의 기본 컨셉에 충실한 것들이었다. 일례로 에포크 프로젝트에 참여중인 스위스와 벨기에 연구진들은 평면 사진만 있으면 3D 모델을 만들수 있는 이미지기반모델링(Image-Based Modeling) 기법을 활용해 과거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불상을 가상복원하는데 성공했다. 3D 모델링이 실물의 두께나 깊이 등을 모두 담고 있어 추후 실제 유적을 복원하는데도 유용하게 쓰인다. 파괴된 고대 유적을 3D 입체영상으로 복원해서 모바일기기로 보여주는 기술도 에포크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됐다. 이는 단순히 웹사이트 상에서가 아니라 현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파괴되기 전의 유적을 실시간으로 보며 이해하는 유쾌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 외에도 에포크 프로젝트는 다국어로 관광 가이드를 하는 아바타나 문화적 루트를 가상경험하게 하는 시스템, 차세대 지능형 ‘시맨틱 웹’을 활용한 고고학 문서 저장소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화유산과 IT의 만남을 주도하고 있었다. 문화와 기술의 만남이 쉽지만은 않았다. 문화전문가들은 기술을 믿지 않았고 엔지니어들은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수많은 국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비슷한 지향점을 보이면서 중복개발도 우려됐다. 바로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EU를 중심으로 한 유럽 공동 프로젝트가 본격화됐다는 게 브라이톤 대학 측의 설명이다. 전체적인 로드맵을 수립하고 하나의 틀 아래서 CT 개발에 나섬으로써 활용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게 유럽 공동 프로젝트다. 로드리게스 박사는 “에포크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살찌우는 기술의 표준을 만들어 전세계가 함께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이 보다 질 높은 문화를 경험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
◆CT강국 `한국`가능성 확인했다 지난해 12월 11일 인천국제공항. 전자신문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문화기술(CT) 포럼이 구성한 공동조사단은 확실한 목표를 가슴에 담고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개념이 등장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CT의 방향성을 유럽 선진 CT 현장 방문을 통해 확립하는 것이 공동조사단의 최우선 과제였다. 사실 당시 공동조사단 역시 CT 개념 정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8박 9일이라는 일정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우려는 첫 기관인 프랑스 IRCAM을 방문하자마자 의외로 쉽게 해소됐다. 그리고 후속일정을 진행하면서 머릿속에는 차츰 CT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다. 정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바로 ‘콘텐츠 중심의 생각’이다. 똑같은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그들은 콘텐츠 발전을 고려했기 때문에 콘텐츠 업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을 필두로 유럽이 세계 문화산업의 중심지로 크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IT의 급속한 발전이 사회를 이끌어온 우리나라에서는 ‘콘텐츠 중심의 생각’이 설 자리가 없었을 뿐이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 얻고자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방문 기관·업체 모두 우리나라 IT인프라에 큰 관심을 보였고 실질적인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동영상 무선 전송기술을 연구하는 팀은 국내에서 와이브로 서비스가 상용화한다는 말에 당장 테스트베드를 고려하기도 했다. 이는 곧 CT의 글로벌화 가능성을 뜻한다. 실제로 그들이 연구하는 내용이 ‘기술 그 자체’로 봤을 때는 아주 획기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첨단 IT인프라와 그들의 문화 창의성이 힘을 합치면 상당한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다. 우리에게 기술적 잠재력은 이미 존재한다. 한류 열풍에서 보듯 문화성도 풍부하다. ‘생각의 틀’만 조금 바꿀 경우 우리가 다가올 CT의 시대를 주도해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결론과 함께 CT 공동조사단은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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