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기술(fusion technology) 개발전쟁이 시작됐다. 세계 각국은 지식기반시대의 경쟁력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술의 융합을 선택했고 정보기술(IT)과 생명기술(BT), 나노기술(NT) 등 이종(異種)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다. 민간기업들도 이들간 융합기술이 향후 경제의 판도를 혁신적으로 바꿀 것으로 예측하면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전세계가 융합기술 개발의 물결속에 급속한 변화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자신문사는 한국과학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전세계 융합기술현장을 탐방, 선진국의 기술개발 추세와 우리나라 정부 및 연구기관이 수립해야 할 정책 및 연구방향을 모색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공상과학소설 ‘환상의 항해’를 87년에 영화로 만든 ‘이너 스페이스(Inner Space)’란 영화가 큰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잠수정을 타고 혈관 안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간 레이저 광선으로 암세포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환자가 흘리는 눈물을 타고 몸 밖으로 나온다. 현실성이 없어보이던 영화의 소재가 20년이 채 안돼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속 아이디어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연구진들은 바로 IT·BT·NT 융합기술을 이용해 세균 크기만큼 작지는 않지만 머리카락 절반 두께의 초소형 기어로 조립한 모터와 손톱만한 크기의 하드디스크가 부착된 마이크로로봇을 만들어 환자를 치료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융합기술이란=융합기술이란 IT·BT·NT 등 최근 급속히 발전하는 신기술 분야의 상승적인 결합(synergistic combination)으로 가까운 장래에 인간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기술을 의미한다. 융합기술은 80∼90년대에 시작된 컴퓨터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혁명과 2000년대 시작한 IT·BT·NT혁명 등 2개 분야의 신기술곡선(S-curve)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융합기술은 그동안 넘지 못했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기존 경제 및 사회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융합기술을 이용하면 인체 안에 들어가는 초소형 로봇에서 시작해 동물과 기계를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바이오시스템 개발이 가능하다. 또 초정밀 가공기술의 발달을 가져와 반도체 제작공정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약물전달체를 개발할 수 있다. 10여년 이상이 걸렸던 신약발견의 속도도 앞당겨 임상실험을 컴퓨터상에서 가능하게 하고 3년 안에 새로운 약을 개발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런 융합기술이 실생활에 적용되면 인간의 인식능력은 물론 건강 및 육체적인 능력의 비약적 향상이 가능해진다. 또 인간과 인간은 물론 인간과 사물, 동물간 커뮤니케이션의 장벽도 제거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융합기술은 국방관련 기술의 비약적 발달을 가져와 국가안전보장능력을 강화할 수 있게 하고 자연과학과 공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이 융합하는 교과과정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왜 융합기술인가=융합 신기술은 개발의 역사가 길지 않아 미국과 유럽 등 기술 선진국과 의 기술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융합기술에 투자해야 하는 큰 이유다. 또 융합기술에 대한 투자는 다양한 첨단산업 분야에 막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가 기반을 잡고 있는 하드웨어(HW)산업과 소프트웨어(SW)산업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미래형 고부가가치 제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융합기술의 강점이다. 미국과학재단(NSF)의 전망에 따르면 IT와과 NT를 융합한 기술은 미래 모든 정보통신 고기능 소자에 필수적으로 적용되는 기반기술이 될 것으로 예측됐다. 이에 따라 나노 응용 반도체시장이 앞으로 10년 후 3000억달러에서 35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BT와 IT의 융합은 2010년에 약 600억달러에 이르고 의약과 농업, 환경 분야에 고부가가치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나타났다. ◇융합기술 전쟁의 시작=세계화에 의해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래 유망기술의 창출과 더불어 이들 지식의 상업적 성공까지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IT·BT·NT 등과 같은 광범위한 파급효과를 가지는 신기술들을 신산업 창출에 활용하고자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주력산업에 IT·BT·NT 등 첨단기술을 접목시켜 경쟁력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선진국 정부는 과학기술기반과 인프라 구축, 인력양성 및 기술혁신 촉진 등 연구주체 스스로 융합기술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은 IT 위에 BT·NT를 융합해 전 분야에 걸쳐 세계적 리더십을 확보하려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추격을 견제하기 위해 제조 노하우를 블랙박스화하는 등 NT를 중심으로 첨단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특히 종적 연구체제에서 탈피해 횡단형 연구개발을 통한 새로운 가치 및 시스템 창출을 위해 2001년 25개 학회가 6개 팀을 편성했다. 98년부터 국립시험연구기관을 포함한 산학연 2∼3개 기관으로 구성된 개방적 융합연구추진제도를시작해 국내외의 우수한 연구자를 결집, 단독연구기관이 수행하기 어려운 학제적 연구를 추진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의 위치와 과제=우리는 그동안 국가차원의 체계적인 융합기술 육성 연구개발(R&D) 프로그램이나 전략이 없었다. 과학기술부처별로 기존 IT·BT·NT 분야의 R&D 프로그램과 연계해 소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최근 과기부를 주축으로 5개 융합기술사업단을 선정했다. 과기부는 5개 사업단을 중심으로 22개 세부과제를 확정하는 등 융합기술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을 시작했다. 이번에 선정된 5개 사업단은 나노-바이오 측정·제어기술 개발사업, 나노 광정보 저장기술 개발사업, 나노 정보소재 합성기술 개발사업, 유용 바이오소재 정보화 및 설계기술 개발사업, 차세대 시큐리티기술 개발사업 등이다. 정부차원의 육성책 외에 대학과 기업도 융합기술 개발의 초기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바이오시스템학과가 설치돼 학제간 인력양성을 추진중이며 숭실대에 생명정보학과 등이 설치돼 융합기술인력 양성이 시작됐다. 또 일부 대기업과 벤처기업에서 실험실칩(lab on a chip)을 비롯해 인공심장, 생체칩, 초고속 신약 스크리닝 시스템, 전자인체를 구현하는 등 융합기술을 이용한 상업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직 융합기술을 활용한 대량 소비상품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10∼20년 후에는 융합기술을 빼놓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신기술 융합은 비록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무궁무진한 파급효과와 이를 통한 산업의 혁명이 전세계 국가들의 경쟁력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 코넬대 산디프 티와리 CNF센터장
“한국은 정보기술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프라를 이용해 새로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바이오와 나노기술의 융합은 아주 미흡합니다.” 산디프 티와리 미국 코넬대 나노연구소(CNF) 소장은 한국이 새로운 성장동력 마련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단순히 하나의 산업을 육성하기보다 기술간 융합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은 융합기술의 발전을 유도하기 위해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직면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융합기술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무엇을 만들려고 애써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술의 융합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필요가 있어도 쉽게 조언을 구할 수 없는 폐쇄적인 연구 분위기입니다.” 티와리 소장은 한국의 폐쇄적인 연구시스템이 융합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라며 미래 성장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시급히 바꿔야 할 점으로 강조했다. 미국 정부의 나노기술 개발 프로젝트의 최전선에 서 있는 그는 단순히 나노기술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코넬 나노센터를 기반으로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새로운 융합기술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 2년간 3번이나 한국을 찾은 티와리 소장은 한국의 과학기술교육 프로그램과 기술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융합기술은 창조적인 생각 뒤에 만들어지는 산물입니다.” 티와리 소장은 한국의 교육제도가 입시 위주의 암기식에 치우쳐 이런 교육으로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과 같은 융합기술품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코넬대 나노센터에 4명의 한국 연구원과 생활하고 있는 그는 한국인의 성실성과 뛰어난 연구성과 도달능력에 놀랐다며 한국인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우수한 인재가 있어도 폐쇄적인 환경에 계속 머무르다보면 인재는 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인재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교육적 제도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아무 것도 쌓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무언가를 만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충고하는 티와리 소장. 그는 융합기술 개발국으로서 한국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며 창의적인 연구 분위기 조성과 연구 결과물이 나올 때마다 산업현장에 적용될 수 있는 연계시스템 구축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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