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나노기술취재의 마지막 여정이다. 가는 비가 흩뿌리는 전형적인 영국날씨 속에 캐번디시 연구소로 차를 돌렸다. 케임브리지대학 물리과에 소속된 캐번디시 연구소는 단일조직으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과학계 최고의 명문이자 세계 실험물리학의 메카다. 1874년 설립 이래 맥스웰·톰슨·러더퍼드 등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연구소를 이끌며 숱한 과학이론을 새로 만들었고 20세기 원자시대를 사실상 열어놓은 영국과학의 자존심이다. 비록 2차대전 이후 세계과학연구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아직도 캐번디시 연구소의 명성은 세계 유수 기업과 재단들이 줄지어 연구비를 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 취재진이 연구소를 방문할 때도 마이크로소프트·인텔 등이 기부했다는 초현대식 연구동이 보였고 곳곳에서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건물안에 들어서자 100년전 과학자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고색창연한 실험기구가 즐비하다. “전통이란게 참 좋지요.” 기자와 동행한 KIST 임상호 박사가 연신 감탄한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10개 연구그룹 중 나노기술과 관련 깊은 광학일렉트로닉스그룹의 리처드 프렌드 교수 연구실을 우선 방문했다. 이 연구실에선 현재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유기 반도체 기술을 집중 연구하고 있는데 유기LED와 트랜지스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케임브리지는 지난 90년 세계 최초로 고폴리머 소재의 유기EL 소자를 개발한 바 있다. 고폴리머 재료들은 뛰어난 형성능력과 열저항, 우수한 기계강도, 3V 이하 발광능력 등 다양한 이점을 제공한다. 이 연구실은 현재 고폴리머 유기EL의 발광효율과 수명면에서 저폴리머 재료를 일부 앞서는 수준에 이르러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유기EL은 가볍고 얇고 저렴한 데다 LCD처럼 보는 각도에 따른 제한도 없지요. 반응시간도 빠릅니다.” 연구실 안내를 맡은 시링하우스 박사는 유기EL 상용화의 기술적 어려움인 금속전극과 고분자, ITO와 고분자 사이의 계면제어문제, 금속과 고분자의 순도 및 금속증착시의 진공도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폴리머 유기EL 분야에서 가장 오랜 연구경험을 가진 조직인 탓일까 연구원들은 제품상용화에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특히 잉크젯 프린터로 EL의 고유색상을 나타내는 고폴리머 픽셀들을 기판 위에 뿌려서 인쇄하는 양산기술도 거의 완성단계에 근접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분자 전자소자 분야에서 앞서가는 리처드 교수는 그동안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독자적인 벤처기업을 창립했다. 요즘에는 보수적인 케임브리지의 학풍도 바뀌어 돈벌이에 나서는 학자들을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라고 한 연구원이 귀띔한다. 점심식사를 한 후 캐번디시 소속 마이크로닉스 리서치센터로 향했다. 이곳 센터장인 하룬 아메드 교수는 인도계인데 친절하면서도 무척 말을 아껴서 마치 수도승 같은 이미지가 느껴졌다. 이 마이크로닉스 리서치센터의 독특한 점은 연구비의 50%를 일본 히타치가 지원하고 내부에 히타치 케임브리지 연구실까지 따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에 들어가보니 사소한 집기 하나까지 일제로 채워져 온통 일본식 분위기가 풍긴다. 케임브리지의 우수한 과학연구 성과를 흡수하려는 일본기업의 해외 R&D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일본과 제휴관계는 지난 89년부터 시작됐는데 주요 단전자 메모리 디바이스, 단전자 논리 회로, 실리콘 구조물, 실리콘 단전자 터널링 트랜지스터 및 회로, 단원자 식각기술 등에서 많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PLEDM(Phase-state Low Electron number Drive Memory)으로 알려진 저전자 드라이브 메모리는 두 연구소가 공동개발, 상업적 응용평가단계에 있는데 실험결과가 매우 희망적이란다. 외국에서 가끔 느끼지만 일본인들은 서구문물 수용에 있어 19세기나 지금이나 정말 빠르다. 아메드 교수는 히타치에서 파견한 8명의 일본인 연구원을 포함해서 총 60명에 이르는 상당히 큰 연구조직을 이끌고 있다. 연구비는 히타치가 절반을 내고 나머지는 영국정부와 EU, 일본 및 미국 등에서 충당하는데 연구의 중점과제는 단전자 디바이스로 새로운 개념의 디바이스를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완벽한 나노 디바이스 제조장비와 특성평가장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무려 6대에 이르는 e빔 리소그래피 장비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e빔 리소그래피 장비가 많으면 조각칼을 골라가며 나무를 깎듯이 디바이스의 크기와 분해능에 따라 최적의 장비를 골라 쓸 수가 있다. 한국의 경우 웬만한 연구기관이 한 대의 e빔 리소그래피 장비를 가진 것과 대조된다. 사실 한 대의 장비조차 없는 나노연구기관도 많지만 말이다. 특기할 것은 아메드 교수는 이미 1960년대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의 부총장인 알렉 브로어스 박사와 함께 e빔 리소그래피 연구를 시작해 현재 40년의 e빔 연구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세계 최초로 e빔 리소그래피연구를 시작한 것이며 이 분야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현 부총장이 나노기술의 기본인 e빔 전공자이기 때문에 나노연구에 매우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아메드 교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 곳에선 공대출신 교수가 대학운영을 총괄하는 사례가 많다. 그는 또 미국 IBM 근무경험도 있어 외부 연구비 수주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연구성과에 대해서 외부에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다. 아메드 교수의 연구팀은 세계 최고의 e빔 기술을 이용해 현재 4∼5㎚ 분해능을 가진 나노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경쟁연구팀인 코넬대학 나노연구소가 10㎚짜리 나노구조물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 이러한 결과는 15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이며 e빔의 정밀도를 개선한 탓이다. 포토레지스터 과정에서 초음파공정 등 각 변수를 잘 제어한다면 분해능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마이크로닉스 리서치센터의 주된 연구방향은 단전자 감지기술과 카운팅기술, 전자소자에서 초고속현상을 이해하고, 나노기술을 전자소자에 적용하는데 맞춰져 있는데 특히 취재진의 관심을 끈 연구성과는 전통적인 유리진공관을 극도로 작게 만든 나노트라이오드(Nanotriode:나노삼극관)였다. 과거 유리전구로 만든 삼극진공관을 나노기술을 이용해서 ㎚단위로 작게 만든 신종디바이스다. 평소 외부에 연구결과를 자랑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아메드 교수지만 나노삼극진공관에 대한 자부심만은 취재진에게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곳에선 진공 나노전자소자라고 통칭해서 부르고 있는데 ㎓단위의 고주파증폭에 탁월한 성능을 발휘해 상용화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거의 유리식 진공관은 현재의 트랜지스터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아요. 높은 전류밀도, 빠른 전자속도 가동 특성이 온도와 거의 무관하고 방사선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장점 때문에 고색창연한 진공관은 고주파 디바이스, 센서 및 플랫패널 디스플레이나 군용통신기기, 오디오의 증폭소자로 아직도 일부 사용되는데 여기에 나노기술을 접목해서 새로운 전자소자로 만든 것이다. 온고지신, 전통의 나라 영국다운 나노기술의 활용방식이다. 그러나 아메드 박사는 마지막 취재여정을 맞아 취재진이 한 말씀 듣고 싶었던 나노기술의 찬란한 미래상에 대해 단정적인 코멘트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영국신사의 합리주의, 혹은 캐번디시 연구소의 위대한 전통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 완벽주의를 실감하며 취재진은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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