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사상의 피피티 수업중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고야의 시투르누스 작게 편집되어 다른 그림들과 같이있어 빛을 보지 못했지만 유독히 그 그림이 내 눈에 끌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끊임없는 야성미로 낭만주의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고야에 대해서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그에 대해 좀 찾아본 결과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도 시대지만 그의 인생도 참 드라마틱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궁정과 귀족사회가 있었고, 혁명이 있었고, 교회의 마녀사냥이 있었다. 세계적 혼란기와 말세적 분위기 그런 속에서 고야는 예술가의 직업을 택햇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기작은 그리 신랄하지 않으나 후기작에서는 그의 풍부한 신랄함과 야성미를 볼 수 있었다.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 남쪽 후엔데토도스라는 벽촌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5세기 기사의 후예이며 아버지 호세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활동하는 14명의 금세공사가운데 인근에서 꽤 솜씨를 인정받는 장인이었다. 교회 제단화를 장식할 그림틀이나 금속대, 의자, 책상다리, 가구 따위에 금칠을 입히는 일에 전문이었다.
8세부터 56년까지 신부가 경영하는 학교에 다녔으며 이 학교에서 평생의 벗, 마르틴 사파데르와 알게된다. 12살이 되던때 데생을 배워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13세엔 처음 붓을 잡았지만 왕립 미술아카데미 선발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태생은 비천했고 그림 실력 역시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14세 고야 일가, 사라고사 시로 이사한다. 이때 베네치아파에게서 배운 사라고사의 화가, 호세 르산 아틀리아에 들어가 원화를 복제, 데상의 기본을 배우는 등 4년 동안 수업을 받는다. 17세때 호세루산에게서 잠시 화가 수업을 거친 다음 미술아카데미에 응시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떠난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였다.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꼴지 판정을 받았다. 그뒤에도 연초 장학생 시험 작품 심사에서 고야는 한표도 얻지 못한다. 3년 뒤에 다시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응시하였으나 또 실패했다. 20세때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l734∼1795) 문하에 들어갔지만 아카데미에서 두 번의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4년뒤 이탈리아의 파르마 왕립 미술 학교 콩쿨레 응모했으나 여기서도 낙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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