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화가 크라나흐 미술 인물 / Die Zeichnungen Lukas Cranachs : Jakob Rosenberg, 1960
Katalog der Lukas-Cranach-Ausstellung Weimar und Wittenberg : W. Scheidig, 1953
Lucas Cranachs Heirat und das Geburtsjahr des Sohnes Hans, 〈Zeitschrift des Deutschen Vereins für Kunst wissenschaft, 2079-84〉 : Dieter Koepplin, 1966
クラナハ(ファブリ世界名集 73) : 東野芳明解說, 平凡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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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일부/목차
1. 개요
2. 초기생애
3. 비텐베르크 시절
4. 말년
5. 평가
6. 참고문헌 비텐베르크 시절
크라나흐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은 아마 빈에 있을 때였을 것이다. 전임자보다 2.5배나 많은 봉급을 받은 것을 보면 그때 그는 이미 유명화가였던 것이 분명하다. 1505년 봄에 그는 엘베 강 연안에 있는 대학도시이자 선제후의 궁정이 있는 비텐베르크에 도착해, 1550년 7월까지 4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크라나흐는 프리드리히를 포함하여 차례로 작센을 다스린 3명의 선제후에게 주문을 받았고,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비텐베르크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비텐베르크는 크라나흐로 인해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크라나흐의 이름은 학교 교장 게오르기우스 시부투스가 1507년에 라틴어로 발표한 크라나흐 찬가를 비롯한 많은 기록에서 자주 발견된다. 때로는 아무 주석도 없이 그의 이름이 불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아마 그가 대중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수인 법학자 크리스토프 쇼이를은 1509년에 출판한 〈오라티오 Oratio〉의 서문을 크라나흐에게 바쳤다. 크라나흐의 생애와 예술을 이야기한 이 라틴어 서문에서 쇼이를은 크라나흐의 인간성을 '친절하고 붙임성 있고 너그러우며 정중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잠시도 빈둥거릴 줄 모르는 그의 보기 드문 근면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장점들 덕분에 크라나흐는 인기 있는 궁정 화가가 되어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2명의 선제후에게도 계속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지 및 대학교수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예술가가 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에도 그가 가톨릭교도들에게서 계속 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예술이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 계층과 신앙을 초월해 사람을 대하는 그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보여주는 또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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