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고택
윤증선생의 고택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전통 건축, 건물의 배치의 의미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문일부/목차
윤증의 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 호는 명재이며 14세 때 도의를 강론하고 성리학을 깨우쳤으며 19세를 전후하여 주자를 배운 18세기 성리학자이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농촌 지방에서 재력을 늘려나간 중소 지주들이 적극 그들의 거주지를 확장하고 주택을 본격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집안에서 치러지던 각종 통과 의례와 주인 남자의 접객은 주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주거 공간 내에 그러한 통과 의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갖춰져야 했으며 접객을 위한 남성들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로 했다.
조상의 사당은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어 사당에 드리는 제사 역시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과 그가 사는 종가는 마을의 실제적인 구심점이 되어 이 종가를 중심으로 혈연관계의 친척들이 명확한 위계를 가지고 주변에 형성되었다. 사랑채나 별당은 집안의 다른 어떤 건물보다 위세 있고 격식 높은 형태를 갖추었다. 배치 상으로도 제사지내는 사당과 동선 상으로 쉽게 연결 되도록 하면서 외부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졌다.
(3)지역적 배경(입지)
15세기 중엽 조선의 정치 문화는 크게 2개로 양분되어 경쟁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한 곳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이고, 다른 한 곳은 연산․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지역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지역 내에서도 다른 파벌이 만들어지면서 파벌의 지역성을 약간 혼미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크게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고 부른다. 기호 학파의 호서지역은 우리나라 예론의 정통 학맥이 줄기를 이룬 곳이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양반 사족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보장되었던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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