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후 감옥은 인간에게 심한 고통을 주는 장소였으며, 중세의 지하감옥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사용되었던 감옥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범죄자들은 배고픔, 추위, 무관심, 그리고 잔인한 매질 등으로 고통 받았는데 감옥에 수감된 사람 증에는 범죄자뿐만 아니라 채무자도 있었다.
모든 재소자는 자신의 유지비조로 간수에게 돈을 내야 했고 간수와 보조간수는 수감자와 이들의 가족과 친구에게서 탈취한 돈으로 살아갔다. 일요일과 휴일이 되면 자선기부금으로 방과 고기와 붉은 스프 등을 수감자에게 주었으나 감옥과 테임즈 강에 떠 있는 감옥선의 비참한 환경은 변화되지 않았다.
1681년에 퍼민(Firmin)은 많은 불행한 채무자를 감옥에서 석방하기 위해 그들이 진소액의 부채와 간수의 수수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많은 박애가도 그를 따랐다.
1700년 기독교지식중진협회 모임에서 죄수에 대한간수의 착취와 학대가 자행되고 있음을 문제 삼고 이러한 일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감옥개혁의 필요성은 18세기에 제기되었으나 초기 개혁가 중에서 범죄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은 오글레토피(Oglethorpe)이었다. 그의 친구인 카스텔(Castell)이 1728년에 채무관계로 런던함대 감옥(Londons Fleet Prison)에 수감되었다.
유지비로 그의 돈을 다 쓰게 되자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채무자 유치장"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두려움은 적중되어 결국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다.
하원은 오글레토피를 의장으로 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후 조사결과 몇 가지 개선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감옥에서 알콜음료의 판매금지가 이루어졌다.
감옥개혁을 가장 강력히 주장한 박애가인 하워드(Howard)는 1755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리스본(Lisbon)에 배편으로 가던 도중에 해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다른 승무원, 승객과 함께 브래스트(Brest)로 오게 되었다. 거기서 전쟁 죄수를 수감하는 불결하고 어두운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하워드와 그의 동료는 프랑스 해안을 따라 다른 여러 감옥으로 끌려다녔으나 어느 곳이든지 환경은 똑같았다. 햇빛과 환기가 안 되는 불결하고 추운 곳이었고 음식도 충분하지 못했고 침대도 없었고 잔인한 학대가 있었다. 하워드는 영국에서 자기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맹세를 한 후 감옥에서 석방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영국에서 자신이 경험한 무시무시했던 역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이 하워드의 감옥개혁에 대한 업적의 근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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