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일이 있다. 바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다. ‘홀로코스트’라고 알려진 이 학살사건은 규모로 본다면 결코 못지않은 학살사건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량 학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1월 27일 폴란드아우슈비츠의 유대인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본문일부/목차
왜 이렇게 많은 유태인을 히틀러와 NSDAP가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자가 된 이유에는 참 다양한 요인들이 설명된다. 프로이드의 심리학까지 동원되고, 어머니가 어느 유태인의 정부였다는 이야기나 히틀러를 대학에서 떨어뜨린 교수가 유태인이라는 말도 있다.그러나 히틀러는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단순한 몽상이나 이상주의보다 현실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어머니의 정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반유태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와 극우 민족주의는 청년 시절에 실업자로 빈(Wien)을 헤메던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는 히틀러가 왜 홀로코스트를 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히틀러와 NSDAP가 반유태주의를 내세운 것은 정당 창립 때부터였다.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내걸고 NSDAP는 보수적인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에서 시작했다. 지지자들을 긁어모으고 정권을 장악하기위해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NSDAP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정권 장악 후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독재 정권의 기반을 든든히 다져야 했다.이에 히틀러는 그 당시 독일인의 굴욕과 분노를 이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충격과,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분노를 결집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분노와 굴욕의 대상을 제거하자는 논리와 행동이 필요한데, 히틀러는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도 독일인의 마음에 쏙 드는 과격한 논리로 말이다.
우선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굴욕을 왜 겪어야 했는가?’였다.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논리가 "등 뒤의 비수"이다. "등 뒤의 비수" 논리는 간단한데, 전선에서 독일군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을 잡은 SPD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독일군과 조국 독일을 버리고 연합군에 항복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자라는 것이다.
· 해피레포트는 다운로드 받은 파일에 문제가 있을 경우(손상된 파일/설명과 다른자료/중복자료 등) 1주일이내 환불요청 시 환불(재충전) 해드립니다.
(단, 단순 변심 및 실수로 인한 환불은 되지 않습니다.)
·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브라우저 오류로 인해 다운이 되지 않으면 고객센터로 문의바랍니다.
· 다운로드 받은 파일은 참고자료로 이용하셔야 하며,자료의 활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운로드 받은 회원님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안내
보고서 내용중의 의견 및 입장은 당사와 무관하며, 그 내용의 진위여부도 당사는 보증하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저작권 및 모든 법적 책임은 등록인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저작권 문제 발생시 원저작권자의 입장에서 해결해드리고 있습니다. 저작권침해신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