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관계된 많은 설화 가운데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은 선덕여왕 지기삼사라 하겠고, 그 중에서도 맨 처음 이야기인 모란 고사가 단연 으뜸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 안에서 선덕여왕은 진정한 지혜와 낭만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과연 여왕의 어떠한 면모가 이러한 이야기를 산출시킬 수 있었는지, 아니면 혹 다른 연유로 인해 조성된 이야기인지를 확인하는 일이 설화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의미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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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왕에 대한 시선
1) 당서에 비친 선덕여왕
정관 9년 사신으로 하여금 천자의 부절을 가지고 선덕여왕을 주국에 명하면서 낙랑군왕 신라왕에 봉하였다고 했다. 연후, 구당서 안에서 당태종과 선덕여왕 간의 외교적 사항의 처음은 정관 17년에 신라가 당나라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일이었다. 당태종은 이에 옥새가 찍힌 황제의 편지와 함께 상리현장이라는 인물을 고구려에 보내 위협을 가한다. 그럼에도 고구려의 신라 침공은 계속 되었다. 그래서 당태종이 친히 군대를 거느려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로 하여금 군사와 말을 모아 당군을 맞이하게 했다. 이에 신라는 대신으로 하여금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수구성을 쳐서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거듭 당과 신라 사이의 유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구당서 열전에는 선덕왕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조금 더 상세하다. 한편 신당서 본기 21년에는 선덕왕에 대한 기사는 없고 신당서 열전에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서만 간단히 수록되어 있다. 이상 구당서와 신당서를 통해서 추릴 수 있는 사항으로, 우선 당나라가 고구려나 백제와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었으나 신라와는 상하 우호적인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당태종과 선덕여왕 사이에는 두 나라 군대의 연합과 여왕의 죽음을 다룬 내용이 전부일 뿐, 상호 문화적인 교류 등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여왕의 아버지가 왕을 하던 시절에는 당나라 고조와 문화 교류한 자취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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