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청혜진
우리는 장보고(張保皐)를 흔히 9세기 신라 중기의 무장(武將)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최고의 무역상권을 쥐고 흔들었던 기업인에 더 가깝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결집력으로 모래알 같이 흩어져 있던 신라인들을 하나로 모으고, 청해진(淸海鎭)을 중심으로 거대한 해상무역기구(海上貿易機構)를 형성했던 그의 글로벌 마인드(Global Mind)는 국제화 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세기 말 노비의 신분으로 지금의 완도 부근에서 출생한 장보고(張保皐)는 9세기 초 동양 최고의 강대국인 당(唐)나라로 건너가 그곳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고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少將)이라는 직책에 오르게 된다. 당시 군중소장은 1천여명의 병사를 인솔하는 권한이 주어지는 장수였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 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사력 양성 방법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에 이르는 지역일대에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소주(蘇州)·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일본으로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하여 깊은 인상과 이해를 얻었다.
외국인으로서 평온한 시기에 군에서 더 이상 출세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보고(張保皐)는 군(軍)을 떠난다. 827년부터 8년간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在唐 新羅人) 자치기구인 신라소(新羅所)와 신라방(新羅坊)의 행정 책임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장보고는 신라소의 책임자로서 이국 땅에서 천시받는 재당 신라인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힘썼다.
그 한 예로 장보고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설립하여 신라인의 구심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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