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원인
백년 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되는 것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샤를 4세는 카페 왕조의 직계이지만 1328년 사망한 이후 계승자가 없어 프랑스 왕위 계승이 단절됩니다. 샤를 4세의 뒤를 이은 왕위 계승권자로 가장 크게 손꼽혔던 후보는 발루아 백작 필리프, 그리고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있었습니다.
발루아 백작 필리프는 샤를 4세의 사촌이었고,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외손자였으니 혈족상 상속권으로는 에드워드 3세가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게르만 족이던 프랑크 시절부터 `살루카 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상속권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드워드 3세가 그 어머니였던 이사벨라를 `통해` 왕권을 계승받는 것이 살루카 법을 위반하는지의 논란의 여지가 되었습니다만, 프랑스인들은 왕위를 외국으로 유출시킬 생각은 없었고(물론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분리 의식은 백년전쟁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덜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의 침공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발루아 백작 필립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왕위 계승권을 일단락 되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나자 에드워드 3세의 불만이 표출될 수 밖에 없었고, 필리프 역시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수복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다가 본격적으로 무력충돌로 발전한 것이 백년 전쟁의 시작입니다.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조인 플랜태저넷 왕가는 프랑스 내에 광범위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약 150년 전, 아키텐(가스코뉴)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상속지를 지참금으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는 뚜렷하지 않았고, 실제 그렇다고 할지라도 국왕은 이런 영주들의 재산과 영지에게까지 간섭할 권한은 없었으므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보다 더 큰 영지를 갖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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