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의 사상
◆장지연의 생애
𠌘(고종 1) 경북 상주~1921 서울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1894년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썼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총무위원이 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 時事叢報〉 주필을 맡아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1901년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었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으나 이듬해 강제 해산되었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주필을 맡았다가 신문이 폐간되자 각지를 방랑하다 귀국하여 1909년 진주의 경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했다. 이듬해 8월 29일 〈해조신문〉에 황현(簧炫)의 〈절명시 絶命詩〉를 게재함으로써 〈경남일보〉가 폐간 당했고 그 뒤 고향에서 칩거했다. 〈유교연원 儒敎淵源〉·〈대한신지지 大韓新地誌〉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들어가는 말
인간의 사유방식은 그가 처한 사회 상황에 의해 그 위상이 설정되게 마련이며 개인적인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기도 힘들다. 사회 상황이나 개인적인 처지가 바뀔 때 그에 대응하여 사상이 전변(轉變)하게 됨은 상례(常例)인 셈이다. 장지연 역시 그러했다.
◆전통적 유학자에서 개화 · 자강사상가로 전변
장지연은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선대의 절의와 지기(志氣)를 배웠으며 성리학을 익혀 우국충절과 유학의 깊이를 더해갔다.
장지연에게 유학은 가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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