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과 두보의 시문학 비교
. 들어가며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당시(唐詩)는 기원전의 주나라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천6백여 년 동안 생산된 시가 보다 양적으로 두세 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백의 자는 태백으로,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천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니던 그는 40여세에 즈음하여 잠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다시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는 712년 한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동안 전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이 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가 「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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