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형성과정과 역사적 전개를 밝히는 데 증거가 될 만한 문헌기록은 매우 드물다. 다만 까다로운 분석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소수의 기록만이 간혹 눈에 뜨일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이전까지의 우리 민간예능 모두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하층민들의 민속과 예술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던 조선조(朝鮮朝) 시대 지배층 및 지식인들의 태도에 기인한 결과이다. 남은 기록들은 역설적이게도 판소리를 포함한 민간예능의 폐해를 언급하는 기회에 이루어진 것들이 많으며, 그렇지 않은 것은 비교적 늦은 시대에 속하는 19세기의 것들이 배부분이다. 18세기 중엽 이전에 관해서는 그나마의 단편적인 자료조차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에 따라 판소리사(史)의 초기 단계에 관한 연구도 대체로 가설적인 추론의 단계를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그 간에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판소리 발생설(發生說) 중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①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에 배뱅이굿의 1인창(人唱) 형태가 영향을 미쳐서 이루어졌다는 설
② 무당굿에서 불리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서 왔다는 설
이 밖에 판소리가 독서성(讀書聲) 또는 가사창(歌辭唱)에서 왔다든가, 판소리계 소설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를 창으로 부르면서 판소리가 생겼다는 설이 제시된 적도 있으나 그 간의 연구에 의해 이 견해들의 개연성(蓋然性)은 희박하여졌다. 또 중국 쪽의 유사한 민속예술에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제기된 바도 있으나 그 근거는 단편적이고 박약하여서 믿기 어렵다.
판소리가 서사무가에 기원을 두면서도 서사무가와는 현격한 차이를 가진 예술로 변모하여 성립하게 된 데에는 조선 후기사회의 전반적인 시대 변화가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무렵 이후의 조선 사회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중세적 질서의 동요와 평민층의 성장은 무속(巫俗)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무속의 세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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