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벵의 종교개혁
. 종교개혁에 가담한 인문주의자
𠆵년 피카르디 지방 노아용 시에서 태어난 쟝 칼벵은 지방 성직자를 위해 일하는 사업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14살 때 교회 성직록의 혜택을 받게 되자 파리로 가서 부친의 계획에 따라 사제직을 가는데 필요한 공부를 계속했다. 몽테커 학교에 들어가서 1528년 초에 문학석사를 받았다.
철학 수업이 끝나자, 칼벵은 파리를 떠나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에 갔다. 왜냐하면 노아용 참사회와 사이가 틀어진 그의 부친이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죽자, 자기가 가장 원하던 기호에 부응하는 생애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게 된 그는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533년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채 파리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벵은 파리에서 상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벵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 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 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 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벵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 뒤 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𠇍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달 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벵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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