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건축
. 도성
1929년 7월의 조사에 의하면 왕경인 경주에서 분황사 서방 약 1町 및 서남방 약 5町 되는 곳, 그리고 황룡사 남대문 터에서 서서남방 약 1町 되는 곳, 또 황룡사 서남각 등에 담장터로 추정되는 돌담이 남아있어 이곳이 왕경이 중심부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돌담 유구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문천에 있었던 일정교터, 월정교터, 효불효교터, 서천의 鬼橋터 등은 신라왕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리가 된다. 井田法이 사용된 시기는 통일 후가 아닌가 생각되나 일부 학자는 그 이전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이 586년에 만들어지고 신라는 좀 늦은 통일 후가 아닌가 추정된다. 『동경잡기』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정전유기상존」이라 되어있고 고서에는 井田遺基로 평양과 남원의 정전유기가 있을 뿐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21년(681) 6월 「王欲新京城 問浮屠義湘對曰雖在 初夜茅屋 行正道則 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成亦 無所益 王乃之後」 (왕이 서울을 새로 만들기를 원하여 승 의상에게 의견을 물으니 이에 답해 말하기를 비록 草野茅屋에 살지라도 정도를 행한즉 福業이 길 것이나 그러하지 못하면 비록 힘들여서 새 서울을 만들지라도 무익할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중지하였다.)란 기록이 있어 새로운 서울을 만들려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왕 9년(689) 8월에 「王欲移都達句伐未果」라는 기록이 있어 달구벌로 이도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효소왕 4년(695) 서시 남시가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에 황룡사 부근으로 왕경이 확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로망은 井田法에 따라 구획되었을 것으로 格子形의 간격은 고려척으로 약 400척인데 남북은 일정치가 않아 360-400척 정도인 것으로 보고 있다. 헌강왕 때에 신라 왕경은 대도시로 발전되었을 것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헌강왕 6년(880) 9월 9일 「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續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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