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전체적으료 요약
유세비우스의 생애와 저서
유세비우스 교회사 1권에서 10권까지를 모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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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비우스는 가이샤랴의 감독이으로서, 바실리우스와 데오도레등 고대인들이 그를 팔레스틴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그는 갈리에누스의 통치 말기에 팔레스틴에서 태어난 듯하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교회사』에서 알렉사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디오니시우스는 갈리에누스의 통치 12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 책에서 갈리에누스의 통치기간 중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한다.
유세비우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가이샤랴의 팜필루스였다. 팜필루스는 베리투스에서 요직을 수행하다가 따라 가이샤라로 왔다. 가이샤랴에는 유명한 학교와 도서관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유세비우스는 팜필루스와 함께 공동작업을 함으로 우정을 쌓게 된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안 황제 치하의 박해상황에서 이들의 학문탐구는 지속될 수 없었다. 305년에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의 숙적이었다. 2년 후에 팜필루스가 체포되었고 2년동안 감옥 생활하다가 처형된다. 이 기간동안에 팜필루스와 유세비우스는 오리겐을 변호하는 5권의 책을 썼고, 유세비우슨 팜필루스가 순교당한 후 여섯 번째 권을 첨가한다.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에 의해 박해가 종식되고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감독에 임명된다. 그러나 리시니우스가 돌변하여 기독교인들을 다시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콘스탄틴이 승리하게 됨으로 기독교인들을 평화를 찾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심각한 소동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리우스 논쟁”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불경한 교의를 공개적으로 개진하였고, 결국 파문을 당하게 된다. 이일로 아리우스는 탄원서를 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콘스탄틴 황제는 비두니아의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감독회의에서 유세비우스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평화와 일치였다. 결국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참되신 하나님의 참 하나님, 피조되지 않고 탄생하지 않은분,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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