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는 1168년(고려 의종 22년) 12월 16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 ),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綬), 벼슬은 호부낭중(戶部郎中)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머니는 금양(金壤, 지금의 강원도 통천) 김씨이다. 외조부의 이름은 중권(仲權), 나중에 시정(施政)으로 고쳤는데 이름난 학자였다. 벼슬이 울진현위(蔚珍縣尉)까지 이르렀다. 그는 개성에서 시공부에 열중하며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어릴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4세 무렵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최충(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린 당시 최고의 사학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그런데 16세, 18세, 20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세 번 모두 낙방하고 말았으니「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감흥을 자유롭게 읊조리는 시에만 힘쓰고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1187년 경에는 오세재의 소개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오세재(吳世材)와 망년우를 맺고 그 모임에 출입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오세재를 제외한 죽림고회의 6명이 ‘그대의 친구 덕전(오세재)이 동쪽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데, 그대가 대신할 수 있을까 ’ 라는 제안을 하자 그는 ‘칠현이 그래 조정의 관작이어서 그 빈 자리를 채운단 말이오 혜강, 완적이 없어진 후에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이다’ 라고 한마디에 거절해 버렸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시를 지음에 있어 무엇보다도 ‘신의(新意 )의 창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독창성이 드러나는 참신한 관점과 표현이 중요함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시의 본질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습작을 하고 방대한 양의 글을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세가 되어서야 겨우 동진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시대의 여건은 정식으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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