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西 金麟厚의 瀟灑園 48詠 考 1. 머리말 16세기 조선 사회는 신진 사림과 훈구척신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간 있었던 네 번의 사화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림들의 도학에 대한 열의만은 대단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보편적으로 지치주의에 입각한 치세제민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도 이들 사림 중 한 사람으로 당시 도학에 입각한 철저한 수양론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배우고 익힌 것을 몸소 실천했던 이로 알려져 있다.1)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당시 도학을 강조하던 학문적 분위기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수학을 받았던 기준(奇遵), 김안국(金安國), 최산두(崔山斗) 등의 영향이 무엇보다 지대했다고 하겠다. 또한 김인후는 24세 때 성균관에서 이황(李滉)과 만나 도학에 대하여 강론하며 사림의 학풍을 조장하고 풍속을 바로 잡을 뜻을 피력하였는데, 이러한 주변 상황은 도학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도학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궁행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고, 문장을 짓는 근거로 삼으니 후에 송시열(宋時烈)과 정조(正祖)의 극찬이 있을 수 있었다. 심지어 정조는 그의 본래 시호인 ‘문정(文靖)’을 ‘문정(文正)`2)으로 고쳤다고 하니, 사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평가하여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인후 생존 당시는 훈구척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도덕과 질서가 갈수록 문란해져만 가니 칭병(稱病)과 봉모(奉母)를 이유로 조정을 떠나 외직에 머무르거나 관직을 그만둔 사림들이 늘어만 갔다. 김인후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뜻이 온전히 실행되기 어려운 것을 미리 알고 부모님을 모신다는 핑계로 외직인 옥과현감(玉果縣監, 지금의 전남 곡성)으로 자리를 옮긴다. 외직에 있었지만, 중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늘 간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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