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역사적변천사 한국영화의역사적변천사 한국영화의역사적변천사 / (한국영화의 역사적 변천사)
본문일부/목차
1) 1945년 ~ 1950년대 : 영화게의 좌.우대립
2) 1960년 : 청춘영화의 흥행과 영화법의 갈등
3) 1961년 ~ 1969년 : 영화법을 둘러싼 갈등
4) 1970년 : TV시대의 개막과 영화계의 침체
5) 1980년 : 개방화시대에 따른 자유화
6) 1990년 : 세계무대에 진출한 한국영화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고,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서둘러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장래 수립될 정부가 문화예술정책을 수립할 때까지 문화예술단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며, 1930년대부터 카프 등 좌파 문화운동을 하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산하에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 다섯 개 부문의 조직을 두었다.
같은 해 19일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가'가 결성되고, 이와는 별도로 11월 15일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은 1945년 12월 16일 '조선영화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주도는 역시 좌파 영화인들이었다.
조선의 문화에술의 재건은 우선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고, 미소 양국에 의한 분단 현상이 시정되기 위하여 민족문화의 건설이 중요하다는 견해에선 큰 이견이 없었다.
이 조직은 같은 해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소, 영의 3상회의가 열리기까지 표면상으로는 지속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자, 판반으로 양분되어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은 좌우익 통합을 바라던 국민적인 염원에도 불구하고, 극과 극으로 갈라져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전에 최인규는 <사랑의 맹서>와 <가미카제의 아들들>등 친일 어용 영화를 만들었다.
재능 있고 기대되었던 최인규 감독도 어쩔 수 없는 세상이었던 것 같다.
최인규 감독에게 있어서는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이 되자 1946년 <자유만세>로 명예를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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