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씨름에 대한 사료는 고구려의 벽화인 각저총에서 찾을 수 있다 벽화에는 심판관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보이고, 두 사람은 맞붙어서 씨름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 자료로서 옛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씨름 을 즐겼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다. 또 단오날에는 씨름 경기를 열어 승 자에게 장사(壯士)또는 용사(勇士)라는 이름과 후한 상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씨름에 관한 최초의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17년(1330) 3월에 왕은 중요한 정사(政事)를 총신인 배전(配佺), 주주(朱柱) 등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과 씨름을 하며 상하(上下)에 예의가 없 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로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력기(角力技) 즉, 씨름이 궐내에서까지 행해질 정도로 보급,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혜왕(忠惠王) 4년 (1343) 2월 8일에 왕은 용사(勇士)를 이끌고 씨름 놀이를 보았고, 충혜왕 동년 11월 4일에는 고용보(高龍普)와 시가(市街)에 행차하여 격구(擊球) 및 각저희(角抵戱)를 보고 용사들에게 포목을 다수 하사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선 왕조 실록>>에 나타난 씨름에 대한 내용은 세종 원년(1419)에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강변에서 씨름을 관람한 일이 있고, 동 12년(1431)에는 승려가 민간인과 씨름 을 하다가 죽는 사고가 있어 그 매장비를 준 일이 있었으니, 씨름이 민간에게 널리 알려 져 있었고 승려도 씨름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중기인 명종(明宗) 15년(1560) 5월의 기록에 의하면 씨름은 마을 어린이와 유생들 이나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궁궐 안에서까지 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대목이 있으며, 이로서 씨름이 시련기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씨름은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를 보면 한 장사가 상대를 매꽂는 씨름장 주변에 한 어린 아이가 엿판을 매고 엿을 파는 모습이 있으니 씨름판 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외에도 <<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5월 단오풍속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젊은이들이 남산의 왜장(倭場)이나 북악산의 신무문뒤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냈다. 그 방법 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하여 구부리고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상대의 다리를 잡아 동시에 일어나면서 상대를 번쩍들어 팽개친다. 결구 밑에 깔리는 자가 패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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