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상해사변 때 처음 실시되었던 '종군위안부‘ 제도는 1938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일반화되었다. 소위 '황군(皇軍)’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대량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게 된 배경에는 ‘남경대학살사건’ 이 있었다. 일본군이 저지른이 중국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강간사건이 반일감정으로 나타나자 일본 군부는 그 대책의 하나로 위안소 설치를 서두르게 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아시아 각 지역으로 전선이 확대됨으로써 위안부가 부족하게 되자 군 간부는 조선총독부와 함께 대대적인 ‘종군위안부 사냥’을 했다. 그 숫자는 최저 8만에서 20만 명까지 추정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후 조선총독부는 그들이 저지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자료를 소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여름 한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일본이 저지른 죄상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그들의 증거인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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