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평가 1920년대 중반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사회가 아직도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양화로 바꾸었다. 작품활동보다는 미술단체를 조직하고 화단을 주도하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때는 조선시대에 전문 화가를 양성했던 도화서제도(圖畵署制度)가 폐지된 이후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없었다. 1911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힘을 합쳐 최초의 사설 미술강습소라 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를 만들었지만 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 등이 서화전을 갖는 정도였을 뿐이다. 동·서양화 작가를 막론하고 작가를 모으고 근대 미술계를 조직적으로 키울 필요성을 절감한 고희동은 13명의 발기인을 모아 민족미술단체 ' 서화협회'(書畵協會)를 발족시켰다. 양화작가도 포함된 서화협회라는 명칭은 일본인 양화가들끼리 ' 조선미술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민족의식의 발동이었다. 그해 창립총회에서 안중식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고희동은 운영을 맡은 총무로 피선되었다. 서화협회의 목적을 보면 "본회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케 함을 목적함"이라 했다. 곧바로 창립전을 열 계획이었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거나 죽어 미루어지다가 1921년 중앙학교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서화협회전은 1936년 15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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