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말
Ⅱ. 적석목곽분이란 무엇인가?
Ⅲ. 적석목곽분의 발굴과 초보적 연구
Ⅳ. 편년을 위한 노력
Ⅴ. 신라사의 복원
Ⅵ. 적석목곽분에 대한 관심과 해석
Ⅷ. 참고문헌
본문일부/목차
Ⅰ.머리말
경주 시내 한가운데는 거대한 봉토를 지닌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중 작은 것은 직경 20미터 정도에 높이 3미터 가량 되지만, 큰 것은 직경이 거의 100미터에 가깝고 높이도 20미터나 된다. 경주 시내의 고분은 인상적인 풍경으로 아직도 경주분지 경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기념물은 신라의 왕과 지배집단의 고분군으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축조된 것이며, 축조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물자가 투입되었던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경제적·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들 고분군이 과거에 지녔던 실제적 의미를 상실해버렸지만, 고대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관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처음 고고학자들의 관심은 소박하고 아마추어적이었으며 제기된 문제의 수준도 대략 그러했다. 이후 우리 고고학 연구가 많은 진전을 이루면서 신라고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설명방식도 다소 발전했지만, 아직까지는 우리 고고학이 경험과학, 혹은 사회과학으로서 이론적 논의를 발전시켜왔다고 자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꾸준한 발굴을 통해 경험자료가 많이 축적되고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알려졌으며, 새로운 성질의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생겨났다. 지금 신라 고분군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는 적석목곽분을 신라사를 해명해줄 수 있는 물질 사료로 주목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즉 신라 고분을 해부하고 나온 유물을 분석하는 목적을 막연히 신라사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사를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신라 고분을 해석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Ⅱ. 적석목곽분이란 무엇인가?
적석목곽분은 옛 신라의 대표적인 분묘형식이다. 신라의 중앙지배자집단이 자신들의 묘제로 축조하였으며, 신라의 영향 아래 있던 지방세력들도 이를 모방하여 유사 적석목곽분을 축조했다. 그래서 주로 경주를 중심으로 분포하며, 부산 복천동, 경산 임당동, 창녕 계성면 고분군이나 의성·삼척·영일 등지의 고분군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보고된 바 있다. 적석목곽분은 경주분지 중앙의 평지에서 주로 발견되고, 구릉이나 산록에서 발견되는 봉토분은 주로 석실분이다. 이는 적석목곽분의 유행 시기와 관련되는데, 대개 5세기를 중심으로 전후 200여 년간 신라 지배자집단의 봉토분은 주로 평지에 축조되었고, 그 구조가 적석목곽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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