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박물관의 역사
1910년, 경주시민의 여망에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면서 신라의 문화 유적 보존을 위해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개설, 문화재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박물관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것을 경주박물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921년에 이루어진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시민 금관고라는 건물을 마련하여 여기에 출토품을 전시 보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의 총독부 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편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편제가 다듬어졌다. 이때까지 동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옛 박물관은 1,200 여평의 터에 온고각·집고관·종각등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규모였다.
그 뒤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높아지면서 경주지역의 유적조사가 활발해져 많은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그 보존과 전시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현재의 자리인 인왕동에 2만여 평의 터를 마련하여 본관과 고분관등 새 건물을 지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며, 1985년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관·전시하기 위해 안압지관을 개관함으로써 모두 세채의 전시관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991년에는 고분관을, 1993년에는 본관을 새롭게 개보수하여 전시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의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있게 되었다.
조사연구와 교육사업
경주가 갖고 있는 문화적 여건 때문에 도시개발이나 건설에 앞서 긴급조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의 계림로 고분군 조사나 80년대에 들어와 도시팽창에 따른 월성로 고분군 조사, 아파트 단지 조성 중에 조사되었던 황성동 유적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긴급조사가 많았다. 이외에 연차적인 조사사업도 실시하고 있는데, 경주 구정동과 조양동 유적, 울진 후포 유적 등 비중 있는 유적을 발굴조사하였으며, 그 밖에 토기 가마나 기와 가마의 조사, 경주 주변 지역에 대한 선사·불적조사 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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