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 비틀거리는 교육`을 보고 시청각 자료를 보면서 우리나라에서의 학구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높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어지러운 상황에서, 교과서도 없는 상태에서 개학을 하였지만 당시 취학률이 64퍼센트나 되었다고 한다. 두 달 후 교과서가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일제 시대에도 우리말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조선어학회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극심한 종이난에 시달렸던 남한의 입장에서는 교과서가 정말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특히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리말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워낙에 많았기에 학생은 물론 교사까지도 한글을 깨치기 위해서 이 책을 거의 필독서처럼 여겼다. 지금이야 매체가 넘쳐나서 문제라지만, 당시만 해도 읽을 것이라고는 교과서가 다였기에 교과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을게다. 정부 수립 후 초등교육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전에 학교 수가 2800여개였던 것에서 이후 3400여개로, 또한 취학률 역시 60퍼센트에서 74퍼센트로 껑충 뛰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학생들에게는 교육이 사치라고 여겨질 만큼 학교교육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정된 것이 의무교육이었다. 이런 의무교육은 교육에서 소외된 학생들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하지만 의무교육 실시 20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당장 생계를 유지하는 게 급선무가 되어버렸지만 우리 국민은 그 와중에도 피난 학교를 통해서 교육을 접했다. 그 수가 187개나 되었고 학생 수도 90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또한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중학교 입학시험이 실시될 정도였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학구열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이후 원조가 시작되었는데, 1953년 유엔 아동 기금에서 식량 원조가 시작되었고 이것을 이용해서 학교급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당연히 하는 걸로 생각하는 급식이 이런 연유로 시작하게 된 것이라니 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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