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Mr. 퇴계」는 퇴계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다큐멘터리로, 그의 사상을 21세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퇴계 이황 (1501~1570), 그는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학자지향형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의 학문적 사상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칭송받고, 본받고자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퇴계는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교육법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의 손자까지도 도산서원이 아닌 서당에 다닐 정도로, 당시의 서당은 암기위주의 형태의 교육법을 사용하여 과거시험에 있어서는 서원보다 더 적합한 형태였다. 퇴계는 올바른 선비 완성을 위한 교육방법을 중시하였으며, 공부에 있어서는 신분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천민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기대승과의 논쟁을 보면 그의 성품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그는 자신보다 26살이나 어린 기대승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논쟁에서 사단칠정론을 일부 수정하는 등 대의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시의 조선 사회의 여성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자식이 죽자 며느리를 재가시키는 등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공직자로서의 모습에서도, 의례적인 전별금(餞別金)을 거부하였으며, 16세기 당파 싸움에서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천재지변이 벌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른바 `바른 말`을 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평소 그는 `부귀는 뜬구름이며, 명예는 나는 파리`라는 비유를 쓸 정도로 관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흔히, 퇴계 이황하면 지폐에나 등장하는 위인, 혹은 옛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말이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사상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일본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철학의 주류를 형성할 만큼 퇴계는 영향력이 큰 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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